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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 프로페셔널을 찾아서] 희망에 대하여 _ 조광원 비투엔 컨설팅 대표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12. 2. 11:55

특별 인터뷰 _ DBguide.net 

[DB 프로페셔널을 찾아서] 희망에 대하여 _ 조광원 비투엔 컨설팅 대표



 누구에게나 삶이라는 과제가 주어진다. 존경 받는 엔지니어로서, 한 기업의 대표로서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비투엔컨설팅의 조광원 대표를 만났다. 국내 데이터베이스 업계에서 신화적 존재로 통하는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조 대표는 자신만의 스토리가 있다. 그의 얘기는 신화적인 성공담이 아니라 ‘희망은 만들어 가는 것’임을 보여 주기에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어머니를 따라 전라도에 내려가, 광주공항이 가까운 광주광역시 송정리에서 자랐다. 홀어머니께서 나를 키우셨는데 가정 형편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도 언제나 의연했고 자식에게는 엄격하셨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아서 그 역할까지 동시에 하느라 그러지 않으셨을까 생각한다. 공항에서 가까운 마을이라서 빨간 머플러를 한 공군 비행사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공군 비행사가 되면 아파트가 나오고 비행 수당이 높아 월급도 많다’는 말을 동네 사람들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어린 나는 고생하는 어머니와 행복하게 살려면 공군사관학교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다.


 큰 도시의 외곽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는 광주 시내로 통학을 했다. 어머니께서 중학교는 큰 도시로 가야 한다며 내리셨던 결정이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사춘기까지 겹쳐 방황을 좀 했다. 그로 인해 정상적인 중학교 졸업장을 받지 못하고 검정고시로 중학 과정을 이수한 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어렸을 때부터 꿈꾸었던 공군사관학교 입학을 목표로 고등학교 생활을 했다. 공부 재주가 있는 편이었기에 신체검사만 통과하면 사관학교 입학은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목표한 대로 공군사관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하고 신체검사까지 무사히 통과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신원조회에서 문제가 발생하여 입학이 좌절됐다. 이 과정에서 그때까지 몰랐던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호적에 올라와 있던 어머니는 나를 낳고 길러주신 그 어머니가 아니었다. 나를 낳고 길러주신 어머니께서 아들의 미래를 위해 당신 이름을 올리지 않으셨던 것이다.





▶ 극복과 좌절


일반 대학 입학을 생각하지 않았던 나는 사관학교 입학이 좌절되면서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막막했다. 그때 담임 선생님께서 ‘방법이 있다’며,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다닐 수 있도록 여러 가지를 보살펴 주셨다. 수학, 과학을 유난히 좋아했던 나는 전남대 수학계열에 입학했다. 2학년에 올라가면서 계산통계학과와 수학과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당시 더 인기가 있던 계산통계학과를 선택했다.

대학 3학년이 되면서 군복무 의무 해결과 학비까지 면제 받을 수 있는 카이스트 입학을 목표로 공부를 꽤나 열심히 하였다. 고혈압으로 몸이 좋지 않았던 홀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대체 복무를 생각했고, 그 방법이 카이스트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목표가 이뤄지기 전에 일이 터졌다. 대학 3학년 2학기 때, 어머니께서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반신불수가 되셨다. 공부와 어머니 병수발을 동시에 해야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교에 다니느라 시험기간 외에는 학교에도 가지 못했다. 그동안 유지해왔던 장학생 혜택뿐 아니라 카이스트 입학이라는 목표도 접어야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붙어 다닌 가난과 중학 시절의 방황, 공군사관학교 입학 좌절에 이은 어머니의 건강 문제까지 시련의 연속이었다. '바르게 열심히 살겠다'는 어머니께 왜 하느님은 또 병을 안겨주시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까지 가톨릭학생회 동아리 활동에도 열심이었던 나는 신앙을 버릴 생각까지도 했다.




▶ 열리던 순간


 공부할 시간이 없었으므로 카이스트 입학 목표를 접는 대신, 당시 총무처(현 안전행정부)에서 선발하는 국비장학생 모집에 응모했다. 대학 졸업 후 7급 전산직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조건이었다. 몇 명의 동기생이 지원했는데 천우신조로 합격했다. 내게 새로운 길이 열리던 순간이었다. 4학년 1학기부터 당시 국가 장학금을 받고 학교에 다녔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공무원이 되었다. 군 복무는 월급을 받으면서 군 생활을 할 수 있는 학사장교로 입대해 했다. 당시에 전산장교나 헌병장교는 인기가 높아서 학사장교 1200여 명 중 50위 안에 들어야 지원할 수 있다는 말이 나돌았다. 20명을 뽑는 전산장교 모집에 내가 다섯 번째로 선발돼 강원도의 한 사단 전산실에 배치됐다. 운 좋게도 그 사단은 ‘국방 관리회계 전산화 시범사단’이어서 육군 예하 부대에 적용할 전산시스템을 개발/적용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때 하드디스크 청소에서 테이프 백업, 프로그래밍, 데이터베이스까지 컴퓨터의 A에서 Z까지 경험했다. 대학 다닐 때, ‘데이터베이스론’ 성적은 B플러스와 A였지만, 군 전산장교로서 실무를 하면서 내 컴퓨터 실력은 제대로 다져졌다.


 코볼 언어로 군사/물자/일보 시스템을 개발하거나 개선했다. 독립된 최신식 건물에서 3~4명의 장교와 6~7명의 사병이 함께 근무하는 그야말로 좋은 근무 환경이었다. 요즘 PC보다 못한 Honeywell Bull DPS6 Plus 미니 컴퓨터를 운영하면서 운영체제와 프로그램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대학에서 배웠던 이론을 토대로 직접 확인했던 기회가 되었다.



▶ DB와의 만남


 중위 진급과 함께 육군본부 중앙전산소로 발령을 받아 이곳에서 내 인생을 바꿔놓은 여러 DBMS를 만났다. 당시는 유니시스(Unisys) 환경에서 유닉스 시스템으로 막 전환되던 때였다. 군에 도입된 오라클 DB 설계와 모델링 등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했다. 그 때가 1989년이었다.

 ‘내 인생의 봄날이 오는구나’ 하는 것을 군대에서 느꼈다. 전산장교로 발탁된 것부터 육군 전산화 시범사단으로 발령에 이어 육군본부 중앙전산소로 발령받은 것까지 거칠 것 없이 앞길이 펼쳐지는 느낌이었다. ‘기회는 노력하고 준비하며 찾는 자에게 온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 바탕은 컴퓨터에 대한 흥미가 아니었나 싶다. ‘재미있구나, 컴퓨터와 뭔가 대화가 되는구나’하는 생각을 했었다. 더불어 사병을 살피며 실무를 처리하는 장교였으므로 시키는 것만 하려는 자세보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일을 했던 경험이 나중에 회사라는 조직을 설립/운영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어머니께서 병상에 계셔서 90년 전역을 몇 개월 앞두고 군에서 ‘저비용’으로 결혼을 하였다. 어머니는 첫 손주를 보고 돌아가셨다.

 군복무를 마치자 마자 총무처 전산직 공무원이 되어 환경청 전산실에 배치됐다. 당시 환경청에서는 PRIME 장비에 오라클 DBMS로 개발하는 대기오염 측정 시스템(TMS) 프로젝트가 한창이었다. 프로젝트 수행사에서 개발자들이 환경청에 파견 나와 개발 업무를 하고 있었는데 나보나 경험이 부족한 것 같았다. 그래서 당시에 그들을 직접 가르치려 했다. 나중에야 내가 그때 했던 행동이 참 어리석었음을 알게 되었다. 소위 갑에서 을의 입장이 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낯선 환경에 와서 고군분투하는 시스템 공급업체 사람들을 믿고 그들의 사기를 올려줬어야 하는데, ‘나 잘난 맛’에 우쭐했던 것이다.

 환경청 전산실에서 TMS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시기에, 내게 새로운 기회가 또 찾아왔을 꿈도 꾸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군대에서 인연이 나를 새로운 환경으로 불러냈다.

 군 복무시절 상관이었던 분이 전역 후 쌍용컴퓨터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마침 그 회사가 공군 인사관리통합시스템(PTIMS) 구축 프로젝트를 수주하면서 오라클 DB를 잘 다루고, 군 체계를 잘 아는 인력이 필요해 나를 찾아 나섰던 것이다. 그 회사에서 내가 받았던 장학금과 4년이라는 의무 복무기간을 지키지 못해 내야 할 돈 모두를 국가에 배상해 주었다. 4년간 이직하지 않는 근무조건이었다.

 당시만 해도 SQL Forms라는 3세대 언어를 할 수 있는 엔지니어가 그리 흔하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DB 실력이 컴퓨터 분야에서 통하는구나!” 하고 실감했다. 코볼로 ISAM, VSAM 파일 시스템에서 액세스하는 프로그램을 만들 때보다 오라클 환경에서는 request만 잘 하면 DB Optimizer가 알아서 답을 빨리 해주는 것이 놀라웠다. 그때 나는 머지 않아 ‘DB가 파일 시스템을 대체하겠구나’하는 확신을 했다.



▶ 자신감



 쌍용컴퓨터(현 쌍용정보통신)에서 공군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료했다. 현역 전산장교와 소통을 잘 하였던 것이 큰 힘이 됐다. 그때 현역 전산장교가 나보다 더 고수가 아니었나 싶다. 을을 신뢰하면서 성공하도록 잘 이끌었으니 말이다. 


 쌍용에서 일할 때 육군 전산병 출신도 적지 않았는데, 상대적으로 내가 주목을 받았던 것 같다. 그 이유는 책임감을 갖고 자신 스스로 결정하면서 추진해 나갔기 때문이지 싶다. ‘그릇을 주면 채우게 된다’는 말이 있다. 장교라는 위치가 주어졌는데 그 자리를 채우다 보니 나도 모르게 더욱더 책임감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쌍용컴퓨터에서 4년 근무를 마칠 시점, 당시 업무를 수행하면서 DBMS에 대한 많은 질문과 문제 해결을 위해 수없이 전화를 하며 괴롭혔던 한국오라클로부터 함께 일해 보자는 제의를 받았다. 본격적인 DB 전문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1992년에 사번 15번으로 한국오라클에 입사했다. 1996년엔 오라클 미국 본사의 CEO(Center Of Expertise)팀에서 파견 근무를 하면서 DB 전문가로서의 기술력과 자신감을 키웠다.

 자신감 얘기가 나왔으니, 이에 대한 얘기 하나를 더 해 보자. 나는 자신감이라는 선물을 갖고 있다. 어머니께서도 ‘뭐를 하든지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 주셨다. 타고난 자신감에 어머니의 교육이 더해지면서 어려운 환경에서도 주저 앉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고등학교 다닐 때도 담임 선생님 외에는 나의 어려운 상황을 몰랐다. 매우 어려운 환경에 있는 학생들이 받는 로터리장학금을 받을 때, 여러 선생님이 “광원이의 가정 형편이 그렇게 어려운지는 몰랐다”고 하셨을 정도였다.




▶ 희망


 이런 얘기를 하면 한 사람의 전형적인 ‘인생 역전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이런 저런 인터뷰를 하면서 어렸을 적 가정환경을 얘기하곤 하는데, 그게 나의 지금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라면 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마음이 약해지기 쉬운데, 그럴 때일수록 새로운 기회가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말자는 생각에서 얘기를 하고 또 한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것을 역으로 생각하면 어려운 일 다음에는 좋은 일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 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잊지 말고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로 늘 가슴 속에 담고 겸손해지려고 한다.




 여담이지만, 고등학교 졸업 30주년을 기념해 홈커밍데이 행사 때 고3 때 담임이셨던 정봉준 선생님을 뵐 수 있었다. 그 담임께서 “자네는 뭔가 해낼 줄 알았어. 아주 아주 힘들었던 상황이었는데도 (자네는) 항상 밝았어”라고 말씀하셨다. 담임께서는 남들 모르게 당신 집에 데려가 밥도 주고 잠도 재워주기도 하셨다. 그런 사랑이 뒷받침이 되었기에 내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밝게 보고 끝까지 해보고자 하는 태도가 생기지 않았나 싶다. (2014.11.26 | 출처: 한국데이터베이스진흥원 | 제공: DB포탈사이트 DBguid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