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투엔 기술기고

[기고] 무제. 경험으로부터의 상념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9. 27. 10:54



좀 오래된 기억이다.

모 금융회사에서 차세대 정보시스템 구축을 위해 의뢰가 들어왔다. 그 당시 우리는 해당 금융 데이터 모델링 경험이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의뢰한 이유는 국내 최대규모 SI업체가 차세대 정보시스템 구축을 위해 약 4개월 전부터 분석과 설계를 수행하고 있는데 현행 정보시스템 대비 달라진 점이 없다는 것이었고 경험이 풍부한 전문적인 데이터 모델러들이 체계적인 설계를 통해 진보적인 방향을 제시해줄 것으로 기대한다는 것이었다.


갑인 해당 금융회사에서 현행 정보시스템을 넘어서는 진보적인 방향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매력이 있기도 했고 금융산업 데이터 모델링 경험을 축적할 수 있다는 점에서 향후 잠재적인 사업기회를 지속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사업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고 약 4개월여 짧은 기간에 전에 없던 상품 데이터 모델 등을 체계화하여 계좌, 거래 등에 연계될 수 있는 체계를 제시하여 고객사로부터 좋은 호응을 얻어 낸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업에서는 새롭게 제시한 데이터 모델 중 일부만 채택되었고 정작 가장 의미 있게 추진하고자 하였던 상품 데이터 모델은 포기하였는데, 그 이유인즉슨 개발을 책임지고 있는 그 SI업체가 반대하고 나선 탓이었다. 갑인 고객사는 만족했는데 SI업체가 반대한 것이다. 상품 데이터 모델은 현행 정보시스템에는 없는 개념으로, 이를 적용할 경우 현행 정보시스템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응용 프로그램 등이 설계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 더 많은 인력, 더 고급 설계 및 개발 인력 등이 필요한데 사업예산 및 사업 기간은 이를 고려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고 한편으로는 현행 정보시스템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이기 때문에 통합 테스트 및 운영상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이슈들을 예측하거나 통제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아쉬움을 남긴 채 SI업체의 요구대로 진행되었는데,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더 좋은 데이터 모델이라고 무조건 추진할 수는 없는 일이다. 상품 데이터 모델을 구현한 상품 시스템을 만들었다면 금융시장환경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는 경쟁력 있는 정보시스템을 보유했을 것이라 확신하고 이로 인해 해당 금융회사는 지금보다 좀 더 시장지배력이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지만, 차세대 정보시스템 구축 사업은 이상만을 쫒아 추진할 수만은 없는 '현실'이고 '현실'은 결국 돈에 귀결된다.


대부분의 SI업체는 일단 사업을 수주하면 안전하게 사업을 마무리하기를 원한다. 좋은 아키텍처를 통한 고객 감동은 별나라 이야기일 뿐, 사업 기간 내에 요구되는 기능들을 완료하여 무탈하게 최대의 이익을 내면 그만일 뿐이다.

 

이 경험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요구되는' 방향성에 부합하는 정보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점이고 데이터 모델도 '요구되는', 즉 목적에 부합하는 데이터 모델을 설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위에 기술한 모 금융회사 사례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고객사가 요구하는 차세대 정보시스템의 방향성이 모호했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에 무엇인가 새로운 방향을 찾고자 했다는 점일 것이다.


차세대 정보시스템이 지향할 방향성을 위해 BPR/ISP, 마스터플랜 수립과 같은 사업을 통해 방향성을 구체화하고 이를 추진하기 위한 일정계획과 예산 등을 준비하는 것이 오래전부터 일반화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세대 정보시스템 구축 사업에 참여해보면 BPR/ISP, 마스터플랜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거나 혹은 BPR/ISP나 마스터플랜 산출물은 단지 참고만 할 뿐 완전히 새로운 요구사항들이 도출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요구사항이 정보시스템의 만족도를 결정한다. 많은 돈을 들인 만큼 신 정보시스템에 대해 만족감을 느끼고 싶다면 요구사항을 구체화할 것을 요구하고 싶다. 구체화된 요구사항이 BPR/ISP나 마스터플랜 사업에서 도출되고 이에 부합한 사업예산과 기간이 확보되고 제안요청서에 누락 없이 기술되어 있고 이를 기초한 제안, 사업자 선정, 기술협상, 사업 수행이 진행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도가 높은 정보시스템이 구축될 것이라 확신한다.

 

악플보다 무서운 것이 무플이라고 했던가... 많은 양의 요구사항보다 무서운 것이 명확하지 않은 요구사항이다. 제발 당신의 요구사항을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제안 요청하라.